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5분 여의 시간.

난 엔딩 크레디트를 다 보고 나오는 타입이다. 내게 영화는 하나의 경험이다. 시간때우기용이나 심심풀이로 영화를 관람하지 못하게 된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면 일종의 작은 성취감이 있다. 어느 대중예술가가 2시간으로 압축한 작품을 감상한다는 의미가 크다. 엔딩 크레디트는 실제로 여러 예술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올라가는 것이라 그들의 이름을 읽으며 그들이 기여한 시간을 떠올리기도 하고 작품의 마지막 여운을 정리하기도 한다. 엔딩 크레디트까지 다 보고 정말로 나가라는 표시로 불이 켜지는 순간, 작은 뿌듯함을 느낀다. 그 순간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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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다가 마네킹이 입고 있는 그것을 본 순간 이현은 그것을 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현이 그 동안 찾아 헤맸던 디자인을 완벽하게 구현한 제품이었다. 이현은 끌리듯 매장에 들어가 다른 색상이 있는지 물었다. 블랙이면 딱일 텐데. 그러나 제품은 스킨톤과 마네킹이 입고 있는 새빨간 색, 단 두 가지만 출시 중이라고 했다. 스킨 색상의 제품을 보니 디자인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다. 과감한듯 디테일이 살아 있는 그 제품은 유색이어야 했다. 빨간색 브라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제품은 강렬한 레드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색상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을 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착용감 또한 최고였다. 어쩌면 지금 이 물건이 너무 마음에 들어 모든 게 좋게 느껴지는 현상일 수 있지만, 그만큼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면 구입해야 맞다. 이현은 새 제품을 문의한 뒤 직원이 비닐에 싸여 있는 새 제품을 뜯어 팬티까지 그대로 착용하고 피팅룸을 나왔다. 옅은 색상의 이너 뒤로 속옷이 비쳐 보였다. 이제부터는 이 속옷에 걸맞는 옷을 찾아야 한다. 비슷한 붉은 톤의 짧은 드레스면 좋을 것 같다. 속옷 세트 값을 치루며 이현은 다음 쇼핑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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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암은 정복되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단상에 오르자 연단을 둘러싼 수천 명의 군중으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암 치료제 개발을 선언하고 난지 어언 14년, 박사는 마침내 모든 투자자들과 무엇보다 암환자들을 가슴벅차게 할 성취를 이루어낸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진 상용화에 필요한 과정과 시간 따위에 관한 설명은 환호성 소리에 묻힐 뿐이었다. 중요한 건 오로지 치료제가 실제로 개발되어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사실 그날의 연설은 그것만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박사가 연설 중간에 낚아채여 단상에서 끌려내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한창 "킹"이라고 별명 붙인 약의 구체적 효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였다. 스코필드 박사의 아버지인 제임스 스코필드 씨의 부고가 전해진 것은. 이 기사는 스코필드 박사가 소식을 전해들음과 동시에 SNS를 통해 퍼져나갔다. 스코필드 박사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추정은 박사 스스로도 하고 있었지만, 관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도 갑작스러웠다. 어제까지도 멀쩡해 보이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제임스 스코필드 씨가 간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0분 후에 새로 편집된 2보는 이 사실을 담고 있었다. 군중 사이에서 스코필드 박사의 아버지가 암을 앓다가 죽었다는 뉴스가 퍼져나가는 데에는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아버지의 죽음에 경악하거나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군중들에게 아버지가 암보다는 노환 때문에 유명을 달리했다고 주장했지만, 소식이 전해진 이후 그 누구도 박사의 해명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뻔뻔한 거짓말쟁이였다. 곧 소란이 일었고 성난 군중은 연단을 부술 기세로 달려들었다. 관계자들은 어떻게든 해명하고 싶어 하는 스코필드 박사를 단상에서 억지로 끌어내렸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이끌려갔다. 구두 한 짝이 벗겨졌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차에 태워졌다. 군중들로부터 멀어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을 차에 태운 이들과 운전하는 사람 모두 안면이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제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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