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언제 죽을지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겠다.

 

 

일단 내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문서들을 없애버릴 것 같다. 사실 이건 무척 산 사람같은 욕망이긴 한데, 파일들은 물론 프린트해놓은 수많은 글들, 수기로 작성한 광범위한 기록들을 소각시킬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누가 이런 것 따위에 관심을 둘진 모르겠으나, 왠지 그냥 두고볼 수는 없다. 내 기록들은 거의 무조건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 목표에 맞는 끝맺음이기도 하고.

 

각종 SNS에 휘갈긴 줄글들은 그대로 둘 가능성이 높다. 그건 분명히 독자를 상정한 글쓰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터넷커뮤니티 일괄탈퇴를 할 텐데, 친구에게 부탁할 수도 있다. 

 

 

 

남겨질 사람들에게,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를 주겠다. 그게 크게 소용될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죽음을 앞두고 소용될 일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또는 모든 일들이 소중히 소용될 수도 있다. 하고 싶은 말 중에는 묻고 싶거나 궁금해할 말도 있을 테니 그 과정을 통해 소통을 하고자 한다.

 

 

나는 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니까 언제나처럼 에어팟을 꽂고 길거리를 휘적휘적 걷고 싶다. 무슨 생각이 들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분명히 이런 시간을 가지고 싶어할 것 같다. 

 

 

두려워할까? 아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이내 체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감정의 굴곡을 겪어야 하겠지.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길지만은 않기를 바란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깊은 잠에 들고 싶다. 피곤을 온몸에 덕지덕지 감은 채 죽기는 싫다. 

 

 

나는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만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질까? 모든 기록을 없애버릴 거라고 말했는데,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이 글을 적게 될까? 마지막이 될 글 한 줄은 남기고 싶을 것 같기도 하다. 분명히 나에 대한 글이 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쥐어짜고 있는 중인데, 그런 면에서 보면 꼭 해야 할 무언가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언제나 그랬듯 그 시간, 그 일분, 그 일초에 원하는 일을 하게 될 것 같다. 계획을 세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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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lk-show host

go and get it 2023. 5. 7. 16:31

 

 

라이브로 송출되는 오랜만의 시간이다.

 

대개 쇼는 서너 명의 게스트에게 각각 15분 남짓한 시간이 부여된다. 대부분은 사전에 합을 맞춘 문답이 오간다. 제스처와 반응까지 계산된 몸짓이다. 관객들의 함성과 반응도 마찬가지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화제로 삼는 이야기는 사실에 기초하되 짓궂거나 매운 뉘앙스를 섞는다. 그것조차 난색을 표시하는 젊은 출연자들이 있지만, 어차피 준비할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이런 토크쇼를 전담하는 관계자들의 능력과 센스에 따라 상당한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도 있는 기회다.

 

그것은 그녀의 쇼가 오랫동안 쌓아올린 명성이다. 이름을 내건 쇼를 가지기까지 그녀는 제작업무를 포함해 엠씨로 20년을 헌신했다. 이것은 그녀가 만든 무대다. 제작 일반에 관여함은 물론 디테일한 장치까지 꼼꼼히 검토한다. 그녀를 오랫동안 따랐던 크루들이 전방에 배치돼 있다. 총괄 매니저와는 눈빛만 봐도 생각을 공유한다. 그렇게 쇼를 키우기 시작한지 십여 년이 흘렀다. 시청 층은 단단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청자들의 유입을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는 뻔한 지적이 처음 나온 게 삼년 전이다.

 

처음 라이브 쇼를 제안한 건 그녀다. 라이브다 뿐이지 합을 맞춰두는 틀은 유지하되, 돌발적인 상황을 한 가지 연출하는 게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그 돌발 상황에 대한 힌트를 출연자에게 미리 주지 않는 게 구성의 핵심이었지만 이에는 많은 반발이 따랐다. 일단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안전제일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시청자들의 보수성을 지적하는 의견이 많았다. 토크쇼는 편하고 즐거워야지, 출연자를 당황하게 하는 환경이나 상황에 피로감을 느끼는 시청자들이 많다는 거였다.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래도 최종 결정자인 그녀는 변화란 위험을 감수하는 과정 없이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지지했다. 결국 라이브 방송은 채택됐다. 비정기적으로 편성되는 라이브쇼에 노련한 패널들이 출연했고, 썩 좋은 반응은 점유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잡음도 적지 않았지만 그 잡음이 곧 화제성이었다. 라이브쇼는 과감해졌고, 방통위의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자극은 작아지는 방향으로 갈 수 없었다.

 

 

"오늘 그 얘기는 꺼내지 말자."

 

총괄 매니저가 그녀의 사무실 문이 기댄 채 슬쩍 흘렸다.

 

"어째서."

 

"너무 빤해. 완벽히 준비해 왔을 거라고."

 

"잇슈를 가진 게스트가 라이브에 출연하려는 이유는 그 잇슈를 꺼내기 위해서야."

 

"맞아. 하지만 이 자식은 또라이야. 차라리 그 얘길 하지 않는 게 녀석을 더 당황시킬 걸."

 

"그럴 거면 애초에 섭외를 하지 말았어야지."

 

"그쪽 매니지먼트에서 먼저 접촉해왔어. 알잖아."

 

"거절할 수 있었지."

 

"하,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그럼에도 난 반대야, 그 잇슈는. 너무 민감해."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그런 뜻은 아니야. 아니, 또라이의 머릿속을 누가 알겠어? 정상적인 사람이 감당 못하는 게 뭐 어때서?"

 

"쇼호스트의 자질은 그런 대처능력에 있는 거야. 날 못 믿어? 왜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들지"

 

"무언가를 노리는 것 같다고, 그 자식."

 

"당연해. 다들 무언가를 노리고 이 쇼에 출연하는 거지."

 

"무슨 뜻인지 알잖아."

 

"오늘따라 왜 이래?"

 

"그냥. 느낌이 좋지 않아."

 

"네가 그렇게 말하니 더욱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총괄 매니저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나가지 말자, 우리."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너무 나간다 싶을 때가 있어."

 

"내가 점유율에 미쳐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넌 시청율이 아니라 자극에 중독돼 있어."

 

"뭐라고?"

 

"들었잖아."

 

"믿을 수가 없군. 네가 그런 소릴 하다니."

 

"오늘은 어쩔 수가 없네. 네 맘대로 해. 그리고 끝나면 제대로 얘기하자."

 

총괄 매니저가 탁 소리 나게 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는 홀로 남아 방금 나눈 대화에 대해 생각했다. 매니저의 전략이 옳았다. 가벼운 흥분으로 들떠 있던 그녀의 가슴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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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다.

 

사랑은 소모적이고 자아를 위태롭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집요한 열정이다. 

그 순간만큼은 태산보다 거대하고 바다보다 깊은 힘을 지닌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억하는 일도 버거워지는 짐이 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사랑만큼 영원이라는 말과 거리가 먼 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수많은 시가 사랑의 영속성을 노래하는 것이고.

 

 

 

언젠가 사랑을 성냥과 숯에 비교한 적이 있다.

 

성냥처럼 한순간에 제 몸보다 커진 뚜렷한 불꽃으로 온몸을 다 태우고 단숨에 까만 재가 되어 휘파람 한 점에도 날려가 버리는 사랑

 

숯처럼 불이 붙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은은한 외형을 지녔지만 일단 붙고 나면 오래 오래 지속되고 이윽고 다 꺼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몸에 온기를 남기는 사랑

 

 

나는 말할 것도 없이 성냥이다. 숯이 되기를 바란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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