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go and get it 2021. 2. 23. 09:53

 

어젯밤 네 꿈을 꾸었지

 

잘 있어?

 

이 사이 나는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날 때가 많아

악몽은 몇 년 전부터 줄곧 꾸고 있지만 기억이 나지 않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야

 

 

잠옷이며 속옷이며, 시트까지 몽땅 적실 정도여서 그렇게 일어나면 샤워를 하거나 옷을 새로 입고 시트를 걷어 세탁기를 돌리곤 해

 

그런 악몽이더라도 기억나지 않는 게, 수면에는 나은 거라고 하더라

 

 

어제는 오랜만에 기억이 나는 꿈을 꾸었어

 

그게 악몽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네가 나왔기 때문인지는 판단이 서지를 않아

하지만 괜찮아. 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이것만은 확실할 거야. 너였기 때문에 나는 얕은 잠밖에는 잘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기억하고 싶어서.

 

 

꿈속에서 너는 나를 보러 왔지.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듯해

그리고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더라도 좋아. 너와 내가 존재했던 씬에서는 적어도 우리는 서로만을 의식하느라 행동이 삐걱거리는 것을 잘 알고도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얗고 조금 지친 표정까지 그대로였지. 꿈속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함께 올라탄 1호선 열차에서 짐을 든 너를 두고 한 칸 옆으로 갔다가 술에 취한듯 이상한 강도에게 폰을 빼앗겼어. 사람들이 많았고 나는 흉기 없이 소리만 지르는 그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기 때문에 욕을 하면서 내 폰을 도로 가져와.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손상되어버렸고 나는 현행범을 용서할 수 없어 그를 붙잡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어. 그런데 도저히 그 번호가 기억나지 않는 거야. 119처럼 그저 세자리 숫자였을 텐데 몇번이나 시도해도 난 그들에게 닿을 수 없었지. 나는 네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강도를 이끌고 네가 있는 옆 칸으로 갔지. 내 설명을 듣고 곧 너는 가방을 내려놓고 그를 꽉 잡았지. 두 손이 자유로웠지만 나는 여전히 신고하는 번호를 기억해내지 못했고, 걸리는 대로 걸려라 하는 듯 짐작하는 번호를 차례대로 눌러보고, 그게 경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는 몇 시 열차에서 강도를 잡았다고 말을 해. 그가 잡혔는지는 모르겠어

 

 

그리고 씬이 바뀌면 너는 나의 집으로 와. 그곳에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었어. 나는 가족에게 너를 소개시키고 내 방이 아닌, 우리집이 아닌 듯하지만 모두가 존재하니 우리집이라고 가정된 그 집의 어떤 방에 너를 데리고 들어가 함께 얇은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눕지. 너와 나는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어깨를 어루만져보고 먼 거리에서 얼굴을 쓸어보지. 잘 있었니? 잘 지내고 있니? 나는 너를 원하는 듯하지만 나는 결코 무언가가 두려워 참는 게 아니었어. 우리 사이에 센슈얼한 긴장은 존재하지 않아. 너와 나는 늘 서로가 궁금할 뿐이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니? 잘 지내고 있니? 잘 못 지낸다 말한다고, 잘 지낸다 말한다고, 그게 꼭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뿐이지. 너와 나는 행간을 읽고 싶어하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대로 두어 주지. 그게 우리가 서로를 가까이 느끼는 방법이지. 네가 팔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최대의 애정표현이라는 것을 알아

 

 

다시 장면이 전환되어 나는 이 집에 모여 있는 모두에게 너를 소개하지. 잘 본 적 없는 가족들까지 너에게 인사를 해. 너는 예의바르게 모두에게 고개를 숙이지. 나의 친구들도 너를 봐. 친구들과 나와 너는 왠지 어떤 아케이드형 몰에 와서 각자 돌아다녀. 나는 쭉 마음에 두고 있던 옷을 입어보려고 너무 좁아서 문이 열리는 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피팅룸에서 그 입기도 힘든 옷을 입어봐. 친구들이 내 옷을 봐주고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지만 알지는 못해. 그 옷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어. 한 친구가 상냥하게 괜찮다고 말해. 나는 내가 입고 있던 반팔 흰 티셔츠에 달라붙는 청바지로 갈아입고 싶은데 그게 너무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아. 나는 온통 까발려진 느낌이었지. 나는 다시 나로 돌아가 아케이드를 호기심을 품고 돌아다니는 너를 따라잡고 싶었어. 네가 내 시야에서 사라져 다시 돌아가버린다고 해도 당황스럽지는 않겠지만, 그게 너와 내가 서로를 품는 방식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혼자 있는 네게 컴퍼니가 되고 싶었어. 너는 나를 보러  온 것이니까. 내 시야에서 너는 그 의미로 존재하니까

 

 

그리고 몇 장면이 더 있었겠지만 이젠 기억이 나지 않아. 이 편지를 쓰는 동안 잊고 말았어.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아. 너는 푸르게 어리고 관성적인 피로와 습관적인 활기로 미소지으며 내게 왔지. 너는 그렇게 묻지 않았지만 잘 있느냐고, 존재하고 있느냐고, 너를 기억하느냐고, 보고 싶었느냐고

 

 

나는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 아침빛으로 어둠이 걷힌 천장을 쳐다봐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 너를 기억해. 나는 존재하고 있어

그냥 잘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너와 나는 그 비에 쓸려가도 아무도 모를 말 한 마디를 망설여. 제대로 말하고 싶기 때문에. 제대로 말하고 싶은 이유는 너와 나는 그 사소함을 소중히 여기게 타고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해도 알아들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잘 지내기 위해 1분을 노력해. 하루나 일주일을 바라며 노력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이 1분을 노력하고 있어

 

 

 

잘 잤어? 이 꿈이 너에게도 닿았니?

너에게 물어볼 수 있지만, 나는 물어보지 않았어

나는 내가 강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어. 약한 내 모습을 네가 느끼지 않기를 바라. 말하지 않아도 너는 내가 약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내가 선택하는 것은 달라. 강해지면 나는 너에게 꿈처럼 말을 걸 거야. 잘 있어? 건강하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

언제나 네가 그리울 거야

너와 다시 밤새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내게 주어지길, 내가 그걸 바랄 수 있게 되기를,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 수 있기를 

 

 

있지. 나는 지난 일년 동안 바라는 게 하나도 없었어. 열망할 기운이 없어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주 조금 다르다면, 꿈속에 네가 찾아왔기에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그리움을 보았어. 그게 달가운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도 나는 꿈에서 깨어나 어스름에 잠긴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어

 

보고 싶다

 

 

 

 

안녕. 네가 우주 저 끝에서도 대기가 존재하는 어떤 행성을 거치면 부드러운 바람이 네 얼굴을 어루만져주기를, 바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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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rangepud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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