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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게더

come out and play 2021. 2. 25. 03:29

 

 

요즘 왕가위 기획전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기회가 닿는 대로 하나씩 보고 있는데, 이십여 년 전에 보았을 때랑 내 안에서 많은 차이를 느낀다

 

 

일단 내가 제일 좋아하는 왕가위의 작품은 <타락천사>였고 그 다음이 아마 <화양연화>였을 것이다(나는 <화양연화>를 처음 본 직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영화라고 느꼈다)

<중경삼림>은 좀 예외로 두고 싶다. 한 시대를 규정했던 영화감독의 가장 대중적인 픽이고, 그 영화를 첫번째로 좋아하든 아니든 그 시대에 왕가위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영화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다음주에 정식 재개봉인데, 물론 보려고 한다

 

 

다시 기획전으로 돌아와,

 

차례대로 <화양연화><아비정전><타락천사>

그리고 오늘(은 아니지만) <해피투게더>를 보았다

 

 

어쩌면 왕가위의 가장 훌륭한 작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십년 만에야 들었다

 

나는 열여섯 이후로 별로 성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이 부여하는 지식과 그에 따라오는 경험들이 내 시야를 확장시켰음은 알겠다. 말하자면 내 눈이 바라보는 중심축은 변하지 않았지만, 컴퍼스의 날개가 넓어졌다고 할까

 

 

옛날에 <해피투게더>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영화가 왕가위의 작품들 중 제일 내 취향이 아니라고 결론내렸었다. 다시 찾아보지 않았었고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다른 영화들은 몇번이나 다시 보거나 클립을 찾거나 ost를 사기도 했었는데. 오늘 보고 나니 전혀 새로운 영화를 본 기분이 든다

 

역시 그때 나는 너무 어렸구나, 라고 쉬운 결론을 내려본다. 몇년 전 데미안을 읽었을 때, 이걸 어떻게 중학생이 읽고 이해했다고 착각할 수 있었을까, 기이할 정도로 놀랐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사실 고전은 서른 넘어서 읽으면 거의 다 그런 생각이 든다. 도저히 청소년이 커버할 수 있는 세계관이 아니다)

 

 

내 어린 기억 속 <해피투게더>는 좋아하는 배우들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이로 나오는 퀴어물이자 멜로이며 로드무비. 둘의 애정씬에 좀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동성이어서가 아니다. 그때면 나는 이성간의 스킨십에도 역시 좀 속이 답답해지곤 했다. 정말 애새끼였다) 

 

나는 그들 사랑의 서사를 전혀 따라가지 못했었다는 걸, 다시 보고서야 알았다. 그들이 말을 주고받는(대부분 몸싸움이 동반되는) 모든 씬이 가슴을 아프게 했고, 둘 모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간절히 그들이 이과수에 함께 닿기를 바랐다. 유기적이지 않은 씬들이 톡톡 쭉 나열되며 플롯과 서사를 만드는 흐름이 완벽했고, 필요없는 장면은 단 하나도 없었고, 모든 감정의 분출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 절망이라 표기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사랑(사실 모든 사랑은 고통이기에)을 왕가위만큼 잘 포착하고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리고 또 앎이 커졌기에 느낄 수 있는 바가 다채로워지고 풍성하다. 이 영화라면, 그래서 더 아팠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그게 영화가 목적한 바라면. 어렸던 나는 우수아이아를 몰랐기 때문에 우수아이아라는 지명이 어떤 환기를 일으키는지, 어떤 막막함과 판타지와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지 느낄 수 없었다. 이과수폭포도 마찬가지다. 그땐 장첸도 몰랐고 사람 얼굴도 잘 못 알아보아서(이건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얼마나 새하얀 도화지처럼 어린지(갓 스물?) 느껴지지 않았다(이건 나도 어렸기 때문이겠지만). 광동어와 만다린을 구분하지 못해, 아휘와 보영이 홍콩말을 하고 장이 대만말(중국말)을 한다는 걸 몰랐다. 오늘은 장의 등장부터 바로 알아듣고 아, 할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많았다

 

 

 

양조위는 욕나올 정도로 잘생겼고

장국영은 눈물나게 아름다웠다. 그가 이 영화를 찍고 불과 몇 년이 지나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겠지만

 

 

<아비정전>에서도 그랬고, 나는 장국영이 어떤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의 끝간데 없는 슬픔과 몸부림과 유약함을 읽지 못했다. 안아줄수도 없고 괜찮으냐고 물을 수도 없고, 옆에 있다면 도저히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를 우주의 슬픔을 응축한 듯한 아름다움. 그가 그런 인물을 그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었다는 점이 또 머리와 눈을 무겁게 만든다. 오늘은 이미 늦었지만 잠에 들 때까지 잠에 들어서도, 그 생각으로 마음이 아플 것 같다

 

 

 

나는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타입의 인간이라, 이런 발견이 올 때마다 좀 당황스럽고 물론 좋다. 아이큐와 대중예술을 제대로 이해하는 바의 상관관계는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주제지만, 또한 나는 머리가 좋으면 대체로 어떤 과정이든 좀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라. 잘난 척한 적은 없지만, 잘난 척 했어도 그게 사실이라 별로 찔리지는 않지만, <화양연화>는 그때와 감상이 비교적 비슷했는데 <해피투게더>는 아예 다른 영화를 본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아마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다른 무언가를 갈망하느라 왕가위 영화 같은 영화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때면 매일매일 새롭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던 시절이니 무슨 일에 휩싸였대도 이상하지 않고.

 

 

스크린 안의 배우 장국영이 참으로 그리운 날이다. 그는 정말이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상만물이 그를 질투한대도 이해가 가고, 모두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고, 그래서 그래서 우주로의 긴 여행을 먼저 떠나버리신 것인지.

 

사실 나는 배우로서 양조위를 훨씬 좋아하지만(그는 내 곁에 오래오래 남아 있어주고 있으니), 장국영이 나온 왕가위의 영화를 연달아 보고 나니 새삼 고백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시절, 홍콩반환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단 그 세기말, 시대착오적인 허무와 낭만이 존재했던 그 짧은 decade,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어린아이의 눈에도 그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충격적으로 좋은 영화를 본 새삼스러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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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rangepud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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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go and get it 2021. 2. 23. 09:53

 

어젯밤 네 꿈을 꾸었지

 

잘 있어?

 

이 사이 나는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날 때가 많아

악몽은 몇 년 전부터 줄곧 꾸고 있지만 기억이 나지 않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야

 

 

잠옷이며 속옷이며, 시트까지 몽땅 적실 정도여서 그렇게 일어나면 샤워를 하거나 옷을 새로 입고 시트를 걷어 세탁기를 돌리곤 해

 

그런 악몽이더라도 기억나지 않는 게, 수면에는 나은 거라고 하더라

 

 

어제는 오랜만에 기억이 나는 꿈을 꾸었어

 

그게 악몽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네가 나왔기 때문인지는 판단이 서지를 않아

하지만 괜찮아. 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이것만은 확실할 거야. 너였기 때문에 나는 얕은 잠밖에는 잘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기억하고 싶어서.

 

 

꿈속에서 너는 나를 보러 왔지.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듯해

그리고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더라도 좋아. 너와 내가 존재했던 씬에서는 적어도 우리는 서로만을 의식하느라 행동이 삐걱거리는 것을 잘 알고도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얗고 조금 지친 표정까지 그대로였지. 꿈속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함께 올라탄 1호선 열차에서 짐을 든 너를 두고 한 칸 옆으로 갔다가 술에 취한듯 이상한 강도에게 폰을 빼앗겼어. 사람들이 많았고 나는 흉기 없이 소리만 지르는 그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기 때문에 욕을 하면서 내 폰을 도로 가져와.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손상되어버렸고 나는 현행범을 용서할 수 없어 그를 붙잡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어. 그런데 도저히 그 번호가 기억나지 않는 거야. 119처럼 그저 세자리 숫자였을 텐데 몇번이나 시도해도 난 그들에게 닿을 수 없었지. 나는 네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강도를 이끌고 네가 있는 옆 칸으로 갔지. 내 설명을 듣고 곧 너는 가방을 내려놓고 그를 꽉 잡았지. 두 손이 자유로웠지만 나는 여전히 신고하는 번호를 기억해내지 못했고, 걸리는 대로 걸려라 하는 듯 짐작하는 번호를 차례대로 눌러보고, 그게 경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는 몇 시 열차에서 강도를 잡았다고 말을 해. 그가 잡혔는지는 모르겠어

 

 

그리고 씬이 바뀌면 너는 나의 집으로 와. 그곳에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었어. 나는 가족에게 너를 소개시키고 내 방이 아닌, 우리집이 아닌 듯하지만 모두가 존재하니 우리집이라고 가정된 그 집의 어떤 방에 너를 데리고 들어가 함께 얇은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눕지. 너와 나는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어깨를 어루만져보고 먼 거리에서 얼굴을 쓸어보지. 잘 있었니? 잘 지내고 있니? 나는 너를 원하는 듯하지만 나는 결코 무언가가 두려워 참는 게 아니었어. 우리 사이에 센슈얼한 긴장은 존재하지 않아. 너와 나는 늘 서로가 궁금할 뿐이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니? 잘 지내고 있니? 잘 못 지낸다 말한다고, 잘 지낸다 말한다고, 그게 꼭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뿐이지. 너와 나는 행간을 읽고 싶어하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대로 두어 주지. 그게 우리가 서로를 가까이 느끼는 방법이지. 네가 팔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최대의 애정표현이라는 것을 알아

 

 

다시 장면이 전환되어 나는 이 집에 모여 있는 모두에게 너를 소개하지. 잘 본 적 없는 가족들까지 너에게 인사를 해. 너는 예의바르게 모두에게 고개를 숙이지. 나의 친구들도 너를 봐. 친구들과 나와 너는 왠지 어떤 아케이드형 몰에 와서 각자 돌아다녀. 나는 쭉 마음에 두고 있던 옷을 입어보려고 너무 좁아서 문이 열리는 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피팅룸에서 그 입기도 힘든 옷을 입어봐. 친구들이 내 옷을 봐주고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지만 알지는 못해. 그 옷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어. 한 친구가 상냥하게 괜찮다고 말해. 나는 내가 입고 있던 반팔 흰 티셔츠에 달라붙는 청바지로 갈아입고 싶은데 그게 너무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아. 나는 온통 까발려진 느낌이었지. 나는 다시 나로 돌아가 아케이드를 호기심을 품고 돌아다니는 너를 따라잡고 싶었어. 네가 내 시야에서 사라져 다시 돌아가버린다고 해도 당황스럽지는 않겠지만, 그게 너와 내가 서로를 품는 방식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혼자 있는 네게 컴퍼니가 되고 싶었어. 너는 나를 보러  온 것이니까. 내 시야에서 너는 그 의미로 존재하니까

 

 

그리고 몇 장면이 더 있었겠지만 이젠 기억이 나지 않아. 이 편지를 쓰는 동안 잊고 말았어.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아. 너는 푸르게 어리고 관성적인 피로와 습관적인 활기로 미소지으며 내게 왔지. 너는 그렇게 묻지 않았지만 잘 있느냐고, 존재하고 있느냐고, 너를 기억하느냐고, 보고 싶었느냐고

 

 

나는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 아침빛으로 어둠이 걷힌 천장을 쳐다봐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 너를 기억해. 나는 존재하고 있어

그냥 잘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너와 나는 그 비에 쓸려가도 아무도 모를 말 한 마디를 망설여. 제대로 말하고 싶기 때문에. 제대로 말하고 싶은 이유는 너와 나는 그 사소함을 소중히 여기게 타고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해도 알아들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잘 지내기 위해 1분을 노력해. 하루나 일주일을 바라며 노력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이 1분을 노력하고 있어

 

 

 

잘 잤어? 이 꿈이 너에게도 닿았니?

너에게 물어볼 수 있지만, 나는 물어보지 않았어

나는 내가 강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어. 약한 내 모습을 네가 느끼지 않기를 바라. 말하지 않아도 너는 내가 약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내가 선택하는 것은 달라. 강해지면 나는 너에게 꿈처럼 말을 걸 거야. 잘 있어? 건강하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

언제나 네가 그리울 거야

너와 다시 밤새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내게 주어지길, 내가 그걸 바랄 수 있게 되기를,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 수 있기를 

 

 

있지. 나는 지난 일년 동안 바라는 게 하나도 없었어. 열망할 기운이 없어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주 조금 다르다면, 꿈속에 네가 찾아왔기에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그리움을 보았어. 그게 달가운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도 나는 꿈에서 깨어나 어스름에 잠긴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어

 

보고 싶다

 

 

 

 

안녕. 네가 우주 저 끝에서도 대기가 존재하는 어떤 행성을 거치면 부드러운 바람이 네 얼굴을 어루만져주기를, 바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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